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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상을 겪으며 느낀 것들한량한 라이프/한량한 에티튜드 2024. 9. 2. 14:04반응형
내가 사주를 공부했고, 사주를 가르쳤고, 사주 풀이를 해줬지만 사실 인생의 단면만을 보고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무리 용한 점쟁이나 사주 혹은 관상가도 내담자의 인생사 전부를 말해 주지는 못한다. 추가로, 내담자가 마음속에 숨기고 있는 사실까지 들여다보지 못한다. 물론, 일부 분이야 집어낼 수 있겠지만 그 역시 내담자의 긴 인생 중 한 장면에 해당한다.
지난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대략 9월 중으로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내 예상보다 빠른 죽음이었다. 당황스럽웠고 두려웠다. 아버지라는 큰 버팀목이 사라져서 두려운 것은 아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미묘하다. 남자에게 자식은 관(官)에 해당한다. 사이가 대면대면하고 어려운 것이 기본값이고, 자녀와 사이가 좋다면 무관 사주이거나 관의 기운을 설기하는 사주일 수 있다. 우리 집 역시 끈끈한 가족애가 넘치는 그런 집은 아니었다. 콩가루에 가까운 집안이었고, 이는 부(父)의 사주가 많은 영향을 미친다. 부모의 사주가 자녀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반대로 자녀의 사주가 때로는 부모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어떤 사주를 가지고 태어나느냐고 중요하지만, 내가 살면서 어떤 노력을 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운명을 통으로 바꾸지는 못하지만, 흐름의 방향을 살짝 비틀 수는 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달아서야 소중함과 절실함을 깨닫는 것이 인간이다. 죽음의 당사자이든 당사자의 곁을 지키는 자이든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죽음에 내가 두려움을 느낀 이유는 죽음 자체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 역시 언젠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갈 터였고, 그 생각을 하니 삶이 얼마나 유한했는지를 한번 더 느끼게 되었다. 내 나이가 벌써 내가 살 수 있는 생의 반을 넘기는 시점이고, 오늘보다 내일 나의 신체는 더 노쇠해질 것이고, 나의 두뇌는 점점 더 총명함을 잃을 것이다. 죽음과 노화는 두려움의 대상이 맞다.
그러나 두려움에 떨고 아무것도 안하기에는 삶이 너무나 짧다. 그 짧은 생을 제대로 살아내기 위해 보다 많은 노력과 단단한 나 자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바로 서야 한다. 나 자신이 바로서야 외부의 풍파로부터 흔들리지 않는다. 삶은 시련과 고통의 연속이라고 했다. 오늘 무사하다고 내일 역시 무사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계속 들이대는 시련과 고통에서도 온전히 나 자신을 지켜내야 한다.
유한한 삶이라고, 어짜피 죽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이라고 막살면 절대 안 된다. 자업자득이라 했다. 생에 뿌려놓고 간 것은 사후에라도 혹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라도 반드시 돌려받게 된다. 어떠한 식으로든. 내 아비 역시 마찬가지다. 본인이 생에 뿌려놓은 좋지 못한 씨앗들을 고스란히 돌려받게 된다. 아마 나 역시 마찬가지일 수 있다. 다만, 이기적이라 들릴 수 있겠지만 내 아비를 그래도 잘 보내려 한다. 본인이 뿌린 씨와 별개로 나는 내 삶을 살고자 한다. 내 삶이 잘 되었으면 하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잘 보내드리려 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다짐한다. 나 자신을 바로 세워 남은 생을 잘 살아내기로. 적어도 외롭고 힘들게 살아갈 내 자신을 위해 잘 살아가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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